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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 지키다 죽은 1천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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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nion
조회 2회 작성일 25-04-13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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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 지키다 죽은 1천여명... 신념 지키다 죽은 1천여명...웅숭 깊은 뚝배기 같은, 영광과 상처의 해미읍성-해미순교성지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고속도로가 뚫려 지금이야 지척이지만, 예전에는 오지나 다름없었다. 이른 시각 출발해도 도착하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있었다.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로 두세 시간은 달려야 서산, 거기서 다시 완행버스를 타야 겨우 닿는 곳이었다.90년대 초반, 이곳 찾을 일이 잦았다. 당시 첫 직장에서 내가 맡은 업무가 '해미 도시계획'이었다. 당시 관련 법에 따라 도시기본계획과 재정비계획을 수행하는 절차였다. ▲ 해미읍성(1872년지방지도_부분)둥글게 그려진 성곽, 해미천, 산줄기 등이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읍성 안에는 동헌, 객사, 청허정 등이 빼곡하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그때도 읍성은 위풍당당했고, 남문 중심의 저잣거리는 아담했다. 부챗살처럼 펴진 길 따라 낡은 집들은 옹기종기 평화로웠다. 저자는 해미천을 건너지 않았고, 가톨릭 성지엔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찾아 들었다. 해미성당은 소담했다. 순교성지사업을 주관하던 신부님께서 휑한 순교 터 작은 오두막에서 기거하신 걸로 기억한다.그 신부님과 당시 많은 얘길 나누었다. 도시계획에 순교성지를 여하간 반영해야 했기에 당연한 순서였다. 다정다감하고 박학하신 분이라 도움도 많이 받았다. 가톨릭 역사는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주고받았다.성지를 꾸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결기 서린 표정도 생생하다. 유쾌한 분이셨고, 잦지는 않았으나 한번 잔을 들면 곧 새벽이기 일쑤였다. 비워진 술병만큼 가톨릭과 해미에 대한 지식은 넓고 깊어만 갔다. ▲ 해미순교성지1866년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신자가 순교하였다. 내포지역 무명 순교자 터인 이곳은 199신념 지키다 죽은 1천여명...웅숭 깊은 뚝배기 같은, 영광과 상처의 해미읍성-해미순교성지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고속도로가 뚫려 지금이야 지척이지만, 예전에는 오지나 다름없었다. 이른 시각 출발해도 도착하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있었다.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로 두세 시간은 달려야 서산, 거기서 다시 완행버스를 타야 겨우 닿는 곳이었다.90년대 초반, 이곳 찾을 일이 잦았다. 당시 첫 직장에서 내가 맡은 업무가 '해미 도시계획'이었다. 당시 관련 법에 따라 도시기본계획과 재정비계획을 수행하는 절차였다. ▲ 해미읍성(1872년지방지도_부분)둥글게 그려진 성곽, 해미천, 산줄기 등이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읍성 안에는 동헌, 객사, 청허정 등이 빼곡하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그때도 읍성은 위풍당당했고, 남문 중심의 저잣거리는 아담했다. 부챗살처럼 펴진 길 따라 낡은 집들은 옹기종기 평화로웠다. 저자는 해미천을 건너지 않았고, 가톨릭 성지엔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찾아 들었다. 해미성당은 소담했다. 순교성지사업을 주관하던 신부님께서 휑한 순교 터 작은 오두막에서 기거하신 걸로 기억한다.그 신부님과 당시 많은 얘길 나누었다. 도시계획에 순교성지를 여하간 반영해야 했기에 당연한 순서였다. 다정다감하고 박학하신 분이라 도움도 많이 받았다. 가톨릭 역사는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주고받았다.성지를 꾸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결기 서린 표정도 생생하다. 유쾌한 분이셨고, 잦지는 않았으나 한번 잔을 들면 곧 새벽이기 일쑤였다. 비워진 술병만큼 가톨릭과 해미에 대한 지식은 넓고 깊어만 갔다. ▲ 해미순교성지1866년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신자가 순교하였다. 내포지역 무명 순교자 터인 이곳은 1995년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성지화를 완료한다. 교회를 세우고, 성소를 복원하였으며, 무명 순교자 무덤을 이장 조성하였다.ⓒ 이영천신 신념 지키다 죽은 1천여명...